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단 편집) === [[비밀경찰]]을 동원한 억압적인 통치 ===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심지어 소련 내부에서조차 차우셰스쿠 시대의 루마니아처럼 강압체제가 횡행했던 곳은 없다.''' >---- >에드워드 베르,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318쪽 중 차우셰스쿠는 권력의 독점과 강화를 위해 문자 그대로 '''전국민'''을 [[도청(범죄)|도청]]했다. 당시 루마니아의 인구 2,100만 명을 감시하기 위해서 10개의 전국 도청 본부, 248개의 지역 도청 본부, 1천 개 이상의 이동 도청 센터가 설치되었고, 루마니아 전역에 도청기만 '''300만 개'''가 있었으며, 커튼 뒤와 액자 뒤는 물론(?) 카페트 밑, 전화기, 벽, 심지어는 부부 침실의 매트리스 속에도 도청기가 숨겨져 있었고, 수도의 모든 거리는 물론이고, 시골에도 대략 15km 간격으로 정규 검문소에서 자동 소총을 소지한 비밀경찰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사방팔방에 도청기를 다 뿌려놓으며 국민들 대부분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밀착 감시했다는 말이다.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4859&yy=2009|#]]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5인 책임제'를 도입해 국민 5명 중 한 명을 비밀경찰 연락책으로 하여 나머지 4명을 감시하고 그들의 언행을 상부에 보고하게 했으며, 비밀경찰 5명 중 1명을 책임자로 하여 나머지 비밀경찰 4명의 행동과 발언을 상부에 다시 보고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어린이들에게 부모를 밀고할 것을 강요했고, 어린이들은 아빠가 술김에 집에서 한 소리는 물론(?) 엄마가 아빠에게 귓속말하는 소리까지 선생님에게 밀고했으며, 이렇게 밀고된 부모들은 '실종'되었다. 그리고 당시 루마니아에서는 집과 공공 시설에 갑자기 침입한 세쿠리타테가 마이크를 설치하면서 시민들의 대화를 도청했고, 모든 국내와 국외의 팩스 사용, 해외에서 들어오거나 나가는 모든 전화와 전신은 차단되었으며, 심지어 전화 대화까지 항상 도청당했고 한다. 이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집안에서조차 자유롭게 말할 수 없어서''' 당시 루마니아에 온 외국인 중 어느 누구도 루마니아 국민들의 '진정한 고통'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루마니아 국민들은 사실상 전부가 정권에 대해 '무언의 소극적인 못마땅함'을 갖추고 있었다고 1985년에 한 영국인 기자가 증언했다.] 이렇게 루마니아 사회는 '남편이 아내를 믿지 못하고 부모는 자식을 믿지 못하는' 침묵에 빠져들었는데, 이렇게 교묘하면서 치밀한(?) 감시와 밀고 조직을 만들어낸 차우셰스쿠는 자신을 '뭐든지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검지손가락'이라고 자화자찬했다. 관광업무를 담당하는 모든 일자리는 [[비밀경찰]]의 끄나풀이었으며, 잠재적인 경쟁자와 동료들에 대한 첩보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도 이러고도 비판을 할까 봐 비밀경찰들을 풀어서 사찰을 하거나 몇 사람만 모이면 잡아버리는 짓까지 했다. 이렇게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국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비밀경찰이 '국가의 적'이나 외국의 스파이로 '''의심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체포하고는 재판 없이 무기한 구금할 수 있도록 해왔으며, 당연히 이 비밀경찰들과 그 일가붙이가 감행한 수탈과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다. 이때 루마니아의 비밀경찰과 그 끄나풀이나 정보원들을 다 합쳤을 때 그 숫자는 루마니아 인구의 약 1/4 정도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국민 45명당 1명이 비밀경찰 소속이었다고 한다.[* 1985년에 [[세쿠리타테]] 수는 11,000명에 정보원은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루마니아의 인구는 약 2,270만 명이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 [[동독]]의 [[슈타지]]는 무려 '''국민 6.5명당 1명'''의 어마어마한 요원을 고용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밀경찰이었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부터는 권력 장악력이 떨어진 차우셰스쿠의 빈자리를 비밀경찰이 채웠다. 문제는 이러한 비밀경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이때에 들어간 돈은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가끔 차우셰스쿠도 돈의 사용처에 대해 놀랐다고 한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의 부하였던 실비우 브루칸이라는 공산당 간부가 직접 계산을 해본 결과 나와 나의 집을 감시하는데 필요한 직원, 자동차, 시간 외 수당 등을 감안하였을 때 한달에 약 20만 레이(Lei)가 들어갔다. 당시 루마니아인의 한달 월급이 2,000 레이 정도였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매우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차우셰스쿠 집권 시기 비밀경찰의 증언에 의하면, 사람들을 도청하는 일보다 오히려 도청기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역정보를 흘리는 것을 더 중점적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도청된 것처럼 몇몇 사람을 불순한 말을 했다고 잡아버리거나 모든 대화가 도청되는 것처럼 꾸몄다는 증언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에 전 국가를 도청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도청하는 것처럼 꾸며서 공포심을 주려는 의도였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제기 되고 있다. [[1984(소설)|왜냐하면 직접 도청을 하는 것보다 도청된다는 소문만으로도 굉장한 심리적 압박과 자기검열을 하는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도청기 숫자가 꽤나 적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인구 1/4가 비밀경찰'도 셰루티타테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퍼뜨린 것이었다고 한다. 물론 군부나 공산당 고위간부들처럼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 특히 차우셰스쿠의 정적들은 반드시 도청했으며, 호텔의 모든 층이나 대통령궁 같은 루마니아 내에서 중요한 장소들은 24시간 내내 도청을 실시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인이 직업과 주소지를 변경하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려면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가능하도록 했으며,[* 사실 [[중국]]도 이와 비슷한 제도를 '후커우(戶口)'라는 이름으로 현행으로 실시하고 있긴 하나, 차우셰스쿠 시기 루마니아처럼 직업 변경까지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하는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존경하던 김일성으로부터 [[려행증|국내의 타 지역 이동을 통제하는 제도]]까지는 도입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에 긴축정책을 펴는 김에 외화낭비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당의 고위 간부와 정권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해외여행을 사실상 금지시켰고, 여행객이 귀국하면 반드시 여행 브리핑을 세쿠리타테에 보고해야만 했으며, 만약 일반인이 여권을 신청한다면 직장에서 해고하거나 감시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세쿠리타테는 외국인과 만나면 무조건 24시간 내에 세쿠리타테에 보고할 것을 강요했으며, 판사나 검사에까지 영향을 미쳐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반차우셰스쿠 인사가 단 한 명도 없게 했다. 물론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세쿠리타테와 국가의 허락을 받은 기관들을 빼면 외국 신문 읽기가 금지되었으며 허용된 관광지 빼고는 외국인과의 대화도 금지되었고, 당연히 모든 외국 방송 청취도 금지되었으며, 루마니아에서 오고가는 모든 편지는 당국의 검열을 받았다. 심지어 당시 루마니아 전체 인구 2,200만여 명 중 무려 400만 명, 즉 '''국민 5.5명 중 1명 가량''' 루마니아 공산당원으로 있었다고 하며, 물론 이들은 차우셰스쿠를 잘 섬긴 덕에 정권의 혜택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다. 심지어 [[티미쇼아라]] 지역은 '불순분자가 많다'고 판단되어 세쿠리타테의 집중 감시 지역이 되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산책을 가려면 '''혼자서 산책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이 동행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 이유는 혼자서 산책하면 외국의 첩자와 반차우셰스쿠 인사와 비밀리에 만나러 가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차우셰스쿠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은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끌려가 다음과 같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당해야만 했다. 당시 수감자들은 벌거벗은 채 축축하고 어두우며 굶주린 쥐들이 가득찬 감방에 갇힌 채 물 없이 과도한 염분에 절여진 음식을 먹어야 했으며, 끝없는 심문을 받으면서 무자비한 구타와 전기고문을 당한 것은 기본이었고, 그 외에도 두 팔을 벌리고 벽에 고정된 풀무에 묶은 뒤 발이 바닥에 닿지 않게 하거나, 문에 손가락이 짓눌리거나, 알몸으로 추위에 놓여지거나,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하거나, 손가락을 단단히 묶고는 그 사이에 막대기를 넣어 손가락을 비틀거나, 권총으로 총살 위협에 처해지거나, 손톱을 뽑는 등의 고문도 당했다. 게다가 고문기술자들은 고문당하는 사람의 동료나 아내가 고문당하는 소리를 녹음해 최대 볼륨으로 들려주거나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거나 발바닥을 가스[[용접]]으로 지지기도 했으며, 심지어 '''수감자의 셔츠 밑에 고양이를 풀어넣은 뒤, 고양이를 때려서 이에 놀란 고양이가 발톱으로 피해자를 할퀴게 하는''' 극악무도한 고문까지 당했다. 다만 후술할 온갖 기행들을 저지르며 국민들을 탄압한 차우셰스쿠는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24년간 철권통치를 휘두를 동안 후술할 [[폭동적 시위진압]] 외에는 대규모 인명살상과 무자비한 형량과는 거리가 먼 지도자였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게오르기우데지 정권보다 '인도주의적'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해 사형 대상도 살인범들과 '국가 재산'을 대규모로 횡령한 사람들 정도로 한정했고,[* 참고로 차우셰스쿠 시기인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104명에 달했다. 특히 루마니아가 경제난에 시달리던 1983~1984년에 경제적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총합 19명에 달하는데, 이들은 대부분 대량으로 고기를 절도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을 징역 20~25년형으로 감형하면서 자신을 '국가의 엄격하지만 친절한 아버지'로 내세우려고 했다. 이처럼 차우셰스쿠의 독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자들처럼 대규모 인명 살상보다는 우상화를 위시한 온갖 기행과 억압성에 기인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참고로 투르크메니스탄은 1999년에 사형제를 완전히 폐지했으나,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실종'되거나 정치범수용소의 극악한 환경과 고문 속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우셰스쿠 시기에 총 64,000명이 죽었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루마니아 혁명 당시 사망자 수가 차우셰스쿠 집권 당시 사망자 수로 와전된 것이고, 심지어 루마니아 혁명 당시 사망자 수라는 것도 완전히 뻥튀기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